로마서 4장 배경지식: 아브라함의 믿음, 할례 이전의 의, 약속을 붙드는 소망
로마서 4장은 바울이 3장에서 선포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의 복음을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논증하는 장이다. 로마 교회 안에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있었고, 유대인에게 아브라함은 언약의 뿌리이자 할례의 시작점이며 민족 정체성의 대표 인물이었다. 바울은 바로 그 아브라함을 들어 복음이 율법 밖 이방인에게 열린 예외적 조치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던 방식임을 보여 준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조상 전승은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는 언약, 땅, 자손, 복의 약속을 담은 공동체 기억이었다. 제2성전기 문헌들은 아브라함을 순종과 경건의 모범으로 높이기도 했다. 그런 배경에서 바울이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는가”라고 묻는 것은 매우 민감한 질문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권위를 낮추지 않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믿음의 의를 증언한다고 해석한다.
바울의 핵심 인용은 창세기 15장 6절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말씀은 할례 제도가 주어지기 전, 모세 율법이 시내산에서 주어지기 훨씬 전의 사건이다. 아브라함은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아직 사라와의 사이에 약속의 아들이 없고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다. 바울은 이 지점을 의롭다 하심의 원형으로 본다.
“여겨졌다”는 표현은 계산하거나 장부에 올린다는 회계적 뉘앙스를 가질 수 있다. 로마의 상업과 후원 관계, 빚과 임금의 세계를 아는 독자들에게 바울의 비유는 분명했을 것이다. 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삯은 은혜가 아니라 마땅한 보수다. 그러나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의가 여겨지는 것은 공로의 지급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다. 복음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을 것을 벌어내는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과 은혜로 주시는 의를 믿음으로 받는 길이다.
바울은 이어 다윗의 시편을 인용한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의 복은 시편 32편의 회개와 용서의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다윗도 같은 복을 증언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왕권의 대표자인 다윗조차 자기 의를 자랑하는 인물이 아니라 죄 사함의 복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제시된다. 의롭다 하심은 죄가 없다고 꾸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고 의를 은혜로 돌리시는 사건이다.
로마서 4장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 중 하나는 할례의 시점이다. 창세기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고, 창세기 17장에서 할례의 표를 받는다. 바울은 이 순서를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읽는다. 할례는 의를 얻기 위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이미 믿음으로 받은 의의 인과 표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할례자의 조상일 뿐 아니라 무할례 상태에서 믿는 이방인의 조상도 된다.
이 논리는 로마 교회 안의 관계를 직접 건드린다. 유대인 신자는 아브라함과 할례의 유산을 자랑할 수 있었고, 이방인 신자는 그 유산 밖에 있었다는 열등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바울은 양쪽 모두를 복음 아래 새롭게 위치시킨다. 할례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고, 무할례자는 같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 교회의 연합은 문화적 표지를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그 표지를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게 하는 복음의 재정렬에서 나온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았다고 말한다. 창세기의 약속은 땅과 자손과 복을 포함하지만, 바울은 그 약속의 지평을 열방과 세상으로 넓게 읽는다. 한 분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다는 3장의 논리가, 4장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의 보편적 약속으로 연결된다.
율법이 약속의 근거가 되면 믿음은 헛되고 약속도 폐하여진다. 이는 율법이 악하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에게 율법은 거룩하지만,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범법을 드러내고 진노의 문제를 선명하게 만든다. 약속이 은혜에 속해야 모든 후손에게 굳게 된다. 모세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이방인에게도 약속이 열리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부르는 것은 창세기 17장의 약속을 복음적으로 읽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한 민족의 혈통적 조상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다. 이 표현은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도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며,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의 부활도 그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해된다.
아브라함의 몸은 나이가 많아 생식 능력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았다. 고대 가문 사회에서 자손은 이름과 상속과 미래를 잇는 핵심이었다. 자손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슬픔을 넘어 약속의 위기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몸의 죽음 같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믿음은 현실을 보지 않는 낙관주의가 아니다. 믿음은 현실을 알면서도 약속하신 하나님이 능히 이루실 것을 붙드는 신뢰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고,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한다. 창세기 전체를 보면 아브라함에게 흔들림과 실패의 장면도 있다. 바울은 그 복잡한 생애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영웅담으로 꾸미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삶을 지배한 결정적 방향, 곧 약속의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완벽한 공로가 아니라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독자에게 직접 연결한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기록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의가 여겨진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약속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부활 신앙이 만난다. 아브라함이 불가능한 출생의 약속을 믿었다면,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 능력을 믿는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 이 문장은 초기 기독교 신앙고백의 압축된 형태처럼 들린다. 십자가는 죄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님의 사건이고, 부활은 그 의롭다 하심의 확증이다. 바울에게 믿음은 추상적 종교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행동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로마서 4장의 배경을 알면, 바울의 논증이 유대 전통을 버리고 새 종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조상 이야기와 시편의 용서 언어를 복음 안에서 다시 읽는 작업임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할례와 민족 경계의 소유물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의 조상이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혈통과 문화, 율법 소유와 무할례의 차이를 넘어,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공동체로 서야 했다.
오늘의 독자에게도 이 장은 자랑의 근거를 바꾸라고 요구한다. 종교적 경력, 전통, 지식, 도덕적 성취는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의롭다 하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듯이 약속을 붙드는 믿음을 통해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가능성의 크기가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본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복음의 소망을 잃지 않게 한다.
참고자료
-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NICNT, 2nd ed., Eerdmans, 2018.
- Thomas R. Schreiner, Romans,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2nd ed., Baker Academic, 2018.
- John Murray, The Epistle to the Romans, NICNT, Eerdmans, 1959–1965.
- C. E. B. Cranfield,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ICC, T&T Clark, 1975–1979.
- Leon Morris, The Epistle to the Romans,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Eerdmans, 1988.
- Frank Thielman, Romans, Zondervan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Zondervan, 2018.
- Colin G. Kruse, Paul’s Letter to the Romans,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Eerdmans, 2012.
- Michael F. Bird, Romans, Story of God Bible Commentary, Zondervan, 2016.
- James D. G. Dunn, Romans 1–8, Word Biblical Commentary 38A, Word Books, 1988.
- Robert Haldane, Exposition of the Epistle to the Romans, 1835.
-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Calvin Translation Society.
- Martin Luther, Lectures on Romans, 1515–1516.
- G. K. Beale and D. A. Carson, eds.,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Baker Academic, 2007.
- N. T. Wright and Michael F. Bird, The New Testament in Its World, Zondervan Academic, 2019.
- Craig S. Keener,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New Testament, 2nd ed., IVP Academic, 2014.
- David A. deSilva, Honor, Patronage, Kinship & Purity: Unlocking New Testament Culture, IVP Academic, 2000.
- E. P. Sanders, Judaism: Practice and Belief, 63 BCE–66 CE,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2.
- James C. VanderKam, An Introduction to Early Judaism, Eerdmans, 2001.
- Craig A. Evans, Ancient Texts for New Testament Studies, Hendrickson, 2005.
- Gerald F. Hawthorne, Ralph P. Martin, and Daniel G. Reid, eds.,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IVP, 1993.
- Joel B. Green, Jeannine K. Brown, and Nicholas Perrin, eds.,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2nd ed., IVP Academic,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