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장 배경지식: 이스라엘의 특권, 약속의 씨, 토기장이 비유와 하나님의 긍휼
로마서 9장은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무겁고도 중요한 전환점이다. 8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신자를 끊을 수 없다고 확신 있게 선언했다. 그런데 곧바로 9장에서는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불신앙 앞에서 실패한 것이 아닌지 묻는다. 만약 하나님이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면, 로마서 8장의 확신도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9–11장은 이스라엘 문제를 다루는 부록이 아니라 복음의 신실성을 변호하는 핵심 단락이다.
바울은 먼저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말한다. 그는 동족 이스라엘을 냉정하게 논쟁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라는 표현은 혈연과 언약 공동체의 깊은 유대를 드러낸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율법과 성전, 조상들의 전통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알았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9장의 논의는 이방 교회를 향한 반유대적 자랑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아픔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학적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 목록은 매우 중요하다. 양자 됨, 영광, 언약들, 율법 수여, 예배, 약속들, 조상들, 그리고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까지 이스라엘에게서 나왔다. 여기에는 출애굽, 시내산 언약, 성막과 성전 예배,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주어진 약속, 다윗 왕조의 기대가 모두 배경으로 깔려 있다. 제2성전기 유대인에게 이러한 특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셨다는 정체성의 중심이었다.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핵심 논리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는 문장에 담겨 있다. 바울은 민족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 안에서도 언약 약속이 단순한 혈통 자동성으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아브라함에게 여러 자손이 있었지만 약속의 계보는 이삭을 통해 이어졌고, 이삭의 두 아들 중에서는 야곱이 선택되었다. 약속은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에 의해 보존되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구분은 창세기 배경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았지만, 창세기에서 언약의 씨는 사라의 아들 이삭으로 특정된다. 바울은 이 예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생물학적 출생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말한다. “약속의 자녀”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연적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생명을 낳는다는 창세기의 패턴을 로마서 안으로 가져온다.
야곱과 에서의 사례는 더 날카롭다. 두 사람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쌍둥이였고, 아직 나지도 않고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이 주어졌다. 고대 근동과 로마 사회에서 장자권은 가문과 상속, 권위의 중요한 원리였다. 그러나 창세기와 예언서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관습적 서열에 묶이지 않으신다는 점을 보여 준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택하심이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이에게 달려 있음을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은 말라기 1장의 언약적·역사적 문맥에서 온다. 현대 독자는 이 표현을 개인 감정의 극단적 호불호로만 읽기 쉽지만, 성경의 언약 언어에서 사랑과 미움은 선택과 비선택, 언약적 선호와 관계의 구분을 가리킬 때가 있다. 말라기는 포로 이후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여전히 야곱을 향한 언약 사랑을 지키셨음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이 문맥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기대어 왔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불의하신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답하며 출애굽기 33장의 말씀을 인용한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는 말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구하는 장면과 연결된다. 이스라엘은 이미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은 자기 긍휼에 근거하여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권리 주장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다.
바울은 바로의 사례도 사용한다. 출애굽 이야기에서 바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한 왕이다. 하나님은 바로를 통해 자기 능력을 보이시고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셨다. 고대 세계에서 왕은 신적 후원과 제국의 힘을 상징했지만, 출애굽기는 가장 강력한 제국 권력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보여 준다. 바울은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완고하게 하실 자를 완고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인간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는다. 출애굽기에서는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완강하게 하는 장면과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시는 장면이 함께 나온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단순한 수학 공식처럼 정리하지 않는다. 바울의 관심은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법정에 세워 따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향해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최종 재판관처럼 말할 수 없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는 예레미야 18장과 이사야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고대 사회에서 토기 제작은 일상적이고 눈에 보이는 작업이었다. 토기장이는 같은 진흙으로 다양한 그릇을 만들 수 있었고, 그릇의 용도는 만든 이의 목적에 달려 있었다. 예레미야에서는 이 비유가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의 가능성을 함께 담는다. 바울은 이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이 진노와 긍휼을 드러내시는 주권적 창조주이심을 말한다.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라는 표현은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악을 즐기시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으로 진노의 그릇을 관용하시고, 긍휼의 그릇 위에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신다고 말한다. 개혁파 주석 전통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의 깊이를 강조해 왔다. 동시에 바울의 논지는 교회의 오만을 세우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자랑을 무너뜨리고 긍휼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있다.
바울은 호세아와 이사야를 인용해 이방인의 부르심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설명한다. 호세아에서 “내 백성이 아닌 자”와 “사랑받지 못한 자”는 본래 언약 파기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을 가리키지만, 바울은 그 언어를 이방인의 포함까지 확장해 읽는다. 하나님은 예상 밖의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는 분이다. 이는 로마 교회 안의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였다. 복음 공동체는 혈통적 우월감이나 이방인의 대체 자랑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도 로마서 9장의 핵심 배경이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은 심판을 겪지만, 하나님은 완전히 멸절하지 않고 남은 자를 보존하신다.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라는 말씀을 통해, 다수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약속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늘 하나님의 긍휼로 보존된 남은 자를 통해 이어져 왔다.
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반응을 대조한다. 의를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의를 얻었고, 율법의 의를 추구하던 이스라엘은 그 의에 이르지 못했다.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향해 가리키는 하나님의 계시였지만, 그것이 자기 의의 체계로 붙들릴 때 걸림돌이 되었다.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은 이사야 8장과 28장을 배경으로 한다. 시온에 놓인 돌은 어떤 사람에게는 안전한 기초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넘어지는 돌이 된다. 바울은 이 돌을 그리스도와 연결해 읽는다.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는 인간의 종교적 자랑과 민족적 기대를 흔드는 방식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복음은 혈통, 행위, 문화적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사람을 세운다.
로마서 9장의 배경을 알면 이 장이 차가운 예정론 논쟁만을 위한 본문이 아님을 보게 된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 창세기의 약속 계보, 출애굽의 긍휼과 심판, 예언서의 남은 자 사상, 제2성전기 유대인의 언약 정체성, 로마 교회의 유대인·이방인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신실하게 남아 있는지를 논증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자랑을 꺾지만, 동시에 절망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오늘의 독자에게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을 인간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태도를 내려놓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당연한 권리로 요구할 수 없고, 구원을 혈통이나 종교적 성취의 결과로 주장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은혜다. 하나님은 약속을 실패하게 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의 부르심을 통해 자기 긍휼의 풍성함을 드러내신다.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서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마서 9장은 불편한 질문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게 한다. 이 장의 목적은 교회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는 데 있다. 이스라엘의 특권도, 이방인의 포함도, 남은 자의 보존도 모두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서 나온다. 로마서 9장을 읽는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을 두려움과 감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약속의 은혜를 붙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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