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7장 배경지식: 큰 음녀, 바벨론, 일곱 산의 제국 도시
요한계시록 17장은 일곱 대접 심판 뒤에 “큰 음녀” 바벨론의 정체를 해석해 주는 장면이다. 16장에서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는다고 선언되었다면, 17장은 왜 그 도시와 제국 질서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보여 준다. 이 본문은 선정적 상징을 자극적으로 읽으라고 주어진 장이 아니다. 요한은 소아시아 교회가 매일 마주하던 로마의 정치 권력, 도시의 사치, 황제 숭배, 무역 네트워크, 박해의 폭력성을 한 인물과 한 도시 이미지로 압축한다. 큰 음녀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문명 질서의 얼굴이다.
천사 중 하나가 요한에게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이겠다고 말한다. 많은 물은 뒤에서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이라고 해석된다. 고대 바벨론은 유프라테스 강과 운하의 도시였고, 예레미야 51장에서도 많은 물가에 사는 바벨론이 등장한다. 요한계시록은 그 구약 이미지를 로마 시대의 세계 도시로 옮겨 온다. 로마는 지중해의 바다길과 속주들의 조세, 노예, 곡물, 사치품을 통해 세계 위에 앉아 있었다. “많은 물”은 바벨론적 도시가 다민족 세계를 경제와 문화의 힘으로 장악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땅의 왕들이 그 음녀와 더불어 음행했다는 표현은 성적 비유를 넘어 우상숭배와 정치적 타협을 가리킨다. 구약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과 권력에 의지하는 이스라엘을 종종 음행으로 묘사했다. 요한은 같은 언어를 로마 제국과 열방의 왕들에게 적용한다. 왕들은 바벨론의 부와 안정, 군사 보호와 명예를 얻기 위해 그 질서와 결탁한다. 제국의 술에 취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단순히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그 영광과 소비와 권력의 약속에 매혹되었음을 드러낸다.
요한은 성령 안에서 광야로 이끌려 가서 붉은빛 짐승을 탄 여자를 본다. 광야는 출애굽과 시험, 계시의 장소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화려한 도시의 실상을 보려면 도시의 광고판 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열어 주시는 광야의 관점이 필요하다. 여자가 탄 짐승은 13장의 바다 짐승과 연결된다. 그 몸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다. 여자는 짐승 위에 앉아 있는 듯하지만, 사실 그녀의 권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의 폭력과 정치 권력에 의존한다.
여자는 자주색과 붉은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며 손에는 가증한 것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금잔을 들고 있다. 자주색과 붉은색은 고대 로마 세계에서 부와 권위, 사치와 권력의 색을 떠올리게 한다. 금잔은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가증함이 담겨 있다. 요한은 제국 문명이 자기 자신을 문명, 평화, 번영으로 포장하지만, 그 중심에는 우상숭배와 착취와 성도들의 피가 들어 있음을 폭로한다. 바벨론의 죄는 외모의 화려함과 내면의 더러움 사이의 깊은 불일치다.
그 여자의 이마에는 “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로마 시대 매춘부의 머리띠 관습을 직접 떠올리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지만, 적어도 이 이름은 그녀의 정체가 숨겨져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바벨론은 역사상 여러 제국의 원형이며, 창세기의 바벨에서 다니엘의 바벨론, 로마 제국,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도시 질서로 이어지는 상징이다. 요한은 로마를 단순히 정치적 수도가 아니라 영적 바벨론으로 해석한다.
요한은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것을 보고 크게 놀란다. 바벨론의 술은 단지 사치와 쾌락만이 아니라 박해의 피다. 로마는 법과 질서를 내세웠지만, 황제 숭배와 공적 충성의 요구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사회적 배제와 고발, 때로는 죽음을 가져왔다. “예수의 증인”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순교와 충성의 언어다. 교회는 정치적 폭력 앞에서 칼로 맞서기보다 증언으로 어린양을 따른다.
천사는 요한의 놀람을 꾸짖듯이 그 여자와 그가 탄 짐승의 비밀을 설명한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짐승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대조되는 패러디 왕권이다.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지만, 짐승은 있었고 없고 다시 올라오는 듯 보이나 결국 멸망한다. 제국 권력은 스스로 불멸을 주장하지만, 요한의 묵시적 시간표 속에서는 이미 끝이 정해진 모방 권세다.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며 또한 일곱 왕이라고 해석된다. 일곱 산은 고대 독자에게 로마를 강하게 떠올리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로마는 일곱 언덕의 도시로 알려져 있었고, 소아시아의 도시들도 로마의 권세와 황제 숭배를 통해 그 질서에 연결되어 있었다. 동시에 일곱 왕의 해석은 특정 황제 목록에만 갇히지 않는다. 일곱이라는 수는 충만한 제국 권력의 연속성을 상징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왕권들이 한 질서 안에서 이어짐을 보여 준다.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구절은 해석사에서 많은 논쟁을 낳았다. 어떤 해석은 로마 황제들의 순서를 세어 보려 하고, 어떤 해석은 제국들의 계승을 본다. 그러나 본문의 목회적 강조는 날짜 계산보다 분별에 있다. 현재 보이는 제국은 절대적이지 않고, 이전 제국들처럼 지나가며, 이후의 권세도 잠시 머문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사적 권력들은 반복되지만 영원하지 않다. 교회는 제국의 현재성에 압도되지 않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판결을 보아야 한다.
열 뿔은 아직 나라를 얻지 못했지만 한동안 짐승과 함께 왕권을 받을 열 왕으로 설명된다. 열이라는 수는 완전한 연합과 총동원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한 뜻을 가지고 자기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준다. 요한계시록은 악이 단지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종교적 연합으로 조직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열 왕은 어린양과 싸우려 하지만,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므로 그들을 이기신다. 이 승리는 교회의 군사력에서 나오지 않고 어린양의 주권과 그와 함께한 부르심 받은 자들의 충성에서 나온다.
17장 후반부에서 놀라운 반전이 나타난다.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며 그 살을 먹고 불로 태운다. 악의 연합은 영원한 우정이 아니다. 욕망과 권력 위에 세워진 동맹은 결국 서로를 삼킨다. 고대 선지자들이 음행한 도시의 수치를 묘사할 때 사용하던 언어가 여기서 바벨론에 적용된다. 요한은 제국 질서의 내부 붕괴를 보여 준다. 하나님을 떠난 권력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여도, 그 안에는 서로를 파괴하는 자기모순이 있다.
천사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자기 뜻을 이루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는 악의 행위가 선하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권세들의 자기파괴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뜻한다. 요셉 이야기에서 형들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선한 계획 안에 포섭되었듯, 요한계시록에서도 짐승과 왕들의 계산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성도에게 이것은 깊은 위로다. 교회가 제국의 압력 앞에서 무력해 보일 때도, 하나님은 악의 동맹과 붕괴까지 다스리신다.
마지막으로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밝혀진다. 1세기 독자에게 이 큰 성은 로마와 분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바벨론은 로마에만 갇히지 않는다. 로마는 그 시대의 가장 선명한 구현이었고, 바벨론은 시대마다 하나님 없는 번영과 우상숭배, 폭력과 사치로 사람을 사로잡는 문명의 이름이 된다. 그러므로 17장은 과거 로마를 해석하는 동시에 오늘의 교회가 어떤 도시와 경제와 문화의 술에 취하고 있는지 묻는다.
요한계시록 17장은 성도에게 두 가지 분별을 요구한다. 첫째, 화려함을 곧 복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바벨론은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며져 있지만, 그 잔에는 가증한 것과 피가 담겨 있다. 둘째, 제국의 힘을 영원한 안전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짐승과 왕들은 한때 권세를 얻지만 어린양을 이길 수 없다. 교회의 소망은 바벨론의 시장과 왕들의 보호가 아니라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신 어린양께 있다.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신실한 자들은 그 어린양과 함께 서도록 초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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